시작하며: 혼돈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서 읽었다. 설경구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김영하 작가의 이 작품은 알츠하이머를 앓는 연쇄 살인마의 이야기라는 설정을 갖고 있다. 이 독특한 설정 덕분에 주인공인 서술자의 불분명한 기억과 기록에 의존한 독백 위주로 서술이 이루어진다. 덕분에 문장이 짧고 간결하며, 사건은 빠르게 전개된다.
읽으면서 어느 내용이 기록인지, 기억인지 구분을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이 혼란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술과 서술이 때로는 뚝 뚝 끊기며 연결되지 않고,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들이 많았지만 알츠하이머라는 설정 덕분에 오히려 더 몰입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었다.
서술자의 기억이 오락가락 하니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나타날 때마다 다른 인물로 변신하며 2~3개의 배역을 연기한다. 결국 이 작품은 '살인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가?' 보다는 '주인공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읽었어야 했다. 그래서 이 글은 기억에 따라 변하는 인물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적어보려고 한다.
기억은 설령 가짜일지라도 인생에서 우리의 배역을 결정짓는 힘이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주인공의 첫 배역에 속다.
주인공 김병수는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스스로 살인을 즐기는 천재적 살인범임을 밝힌다. 다만 뇌 손상으로 대략 25년 가까이 살인을 멈췄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발생하고 있는 새로운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을 박주태라고 확신한다. 살인자의 감각이 박주태를 의심스러운 인물이라고 말해준다. 그런데 그는 주인공 주변을 어슬렁대고, 급기야 주인공의 딸과 연애를 시작한다. 김병수는 결국 딸을 지키기 위해 박주태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의 정신과 기억은 온전하지 못하다. 그는 기록의 힘을 빌려 망각과의 사투를 계속해 나간다.
나는 비록 연쇄 살인범일지라도 소설의 주인공이니까 그래도 이제는 착해진 주인공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던 것 같다. 실제로 주인공은 유머 감각이 있고 문학적 소양도 높았다. 게다가 소중한 존재인 딸을 지키고자 하는 호감형 인물이었다. 게다가 "전문가는 내가 모르는 것을 이야기할 때에만 전문가이다"라고 말하는 노인 특유의 지혜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은 순진한 독서였다는 것을 책을 덮을 무렵에 깨닫게 되었다. 다시 읽어 보면 아예 첫 문장부터 왜곡된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작중 인용된 니체의 "혼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혼돈이 당신을 쳐다본다"라는 문장이 이 작품에 걸맞은 표현이다.
숨겨진 두 번째 배역, 연쇄살인마
또 다른 배역은 기록 밖에 존재한다. 잃어버린 기억 속에 숨어있는 살인범이다. 평생 살인을 해 왔던 김병수를 가장 잘 나타내는 정체성이다. 살인 장면은 작품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서술자 스스로 살인의 즐거움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중간에 박주태를 죽이기로 결심한 이후에는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도 좋아진다.
나는 책을 읽으며 당연히 두 번째 정체성에 비중을 두어야 했다. 사실 이 작품은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서술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첫 번째 정체성에 비중을 두고 본 것이다. 아마 사람을 믿고 싶어 하는 나의 습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주인공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주인공의 딸 '은희'다. 그런데 이 은희라는 인물도 여러 개의 배역을 갖고 있다. 그녀는 최근에 살해된 주인공의 요양보호사이다. 동시에 작품 내내 그리고 주인공이 지키고자 애쓰던, 자신의 딸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지막에 결국 은희는 20여 년 전에 살해된 어린아이로 밝혀지고 만다.
박주태라는 예비 범인 후보는 어떠한가? 새로운 연쇄 살인범이자, 퇴직 형사이고, 또한 딸의 애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결말에서는 다시 현직 경찰관으로 밝혀진다.
이러한 혼란들을 제거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요약하면 "치매 걸린 연쇄 살인범이 다시 살인을 시작했고 체포됐다"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짧게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사건이 불명확한 기억과 기록에 의존하는 서술자 덕분에 매우 복잡한 소설이 되도록 했다. 새삼 김영하 님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세 번째 배역, 아무것도 아닌 사람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살인범 김병수든, 착해진 김병수든 의미가 없어진다. 소설의 마지막으로 갈 수록 주인공은 또 새로운 배역을 연기하게 된다. 선악구도에서 벗어나고 있는, 새로운 배역이다.
범행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니 처벌도 의미가 퇴색된다. 그저 망각의 힘 앞에 무력한 한 사람일 뿐이다. 기억을 잃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이 작품에는 반야심경의 내용이 직접 인용되어 두 번 나타난다.
심지어 두 번째 인용은 작품의 클로징으로 나타난다. 위의 이미지를 보면 알겠지만 반야심경의 경구는 결국 "없다"의 반복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라는 그 경구를 굳이 반복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세 가지 배역 중에서 결국 김영하 작가의 주제에 가장 근접한 것이 결국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필멸의 존재로서 인간성에 대한 고민은 김영하 작가의 다른 작품 "작별인사"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거기서는 인공지능이 가득 찬 세상에서 인간으로 남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인물을 그려냈다. 이 작품에서는 '망각' 앞에서 지워져 가는 악인을 그려낸다.
다만 이 연쇄살인범 주인공은 알츠하이머를 두고 "인생이 연쇄살인범에게 보내는 짓궂은 농담, 혹은 몰래카메라" 라고 말하며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연쇄살인범 김병수에게 있어 타인은 그저 자신의 쾌락을 위한 살인의 대상일 뿐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알츠하이머 치매로 인하여 가상의 '은희'라는 유의미한 존재가 생겨났고, '아버지'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병세가 진행되어 기억을 잃으면서 살인범의 정체성이 회복된다. 결국 살인을 저지르면서 '아버지'라는 배역마저 '없던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며 :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고, 기억이 존재를 결정한다.
이 작품에는 피해자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잔혹한 살인 과정에 대한 묘사도 없었다. 여러 모로 지난번 포스팅한 이상의 소설 "날개"와 유사하다고 느꼈다. 비정상적인 인지 상태의 서술자가 작품을 이끌고, 그의 생각과 독백 위주로 사건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뭘 믿고 뭘 믿지 말아야 할 지 모르게 만들었다. 이 글에서는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주안점을 두고 작품에서 나타나는 주인공의 3개의 배역을 알아봤다. 그중 세 번째 배역이 결국은 가장 비중이 크다고 판단했다. 기억의 상실로 인한 정체성의 혼돈 그 자체가 이 작품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기억은 존재와 관계를 모두 결정하는 힘이 있다. 결국 기억이 우리 자체일 수도 있다. 좋은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좋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기억은 불완전하다.
문득 나의 독서 노트들이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서 읽어보면 도무지 왜 그런 메모를 했는지 책을 두 번 세 번 다시 읽어봐도 모르겠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결국 나는 기록을 바탕으로 다른 기억과 조합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 노트에 기반한 나의 글들은 분명 거짓은 아니다. 그런데 신뢰해도 되는 것일까?
사실 우리는 사소한 것들은 모조리 망각한다. '굵은 글씨체'로 저장된 기억들만이 계속 남아있다. 그 기억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해 준다. 왜곡된 기억일지라도 그 힘은 강력하다. 삶을 행복하거나, 반대로 비참하게 바꿀 수 있다. 기억 자체를 바꿀 수는 없더라도, 해석을 달리 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배역은 어떤 기억에 지배되고 있는가?
......
자신의 기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보시기를 바란다.(급 마무리)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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