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고생하며 읽다
오랜만에 진정으로 '괴로운 독서'를 경험했다.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만 아니라, 읽은 내용도 머릿속에 제대로 남지 않았다. 그래서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번역자의 문제인가 싶어 다른 번역본을 찾아 읽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이 책은 나에게 집중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사실 넷플리스에서 감명 깊게 본 영화 "바튼 아카데미" '(원제:The Holdovers) 때문이었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허넘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두 명에게 같은 선물, 책 <명상록>을 선물한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서는 성경이나 코란과 같은 책이며, 필독서라며 극찬한다. 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런 책이면 당연히 내가 읽어줘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게 설마 한 달이 꼬박 걸릴 줄은 몰랐다.
이 영화는 상처를 안고 있는 스승과 제자의 우정을 그린 잔잔한 감동을 준다. 자극적이지 않고, 폭력적이지 않으며, 악당도 나오지 않지만 몰입하게 되는 영화다. 한번 보시기를 추천한다.
아참 명상록 리뷰인데..
... 이제 책 리뷰를 시작해보자.
길고 생소한 문장의 벽을 느끼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이 어렵다고 느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문장의 길이와 생소한 단어들이었다.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단어들이 가득했고, 이로 인해 외국어로 된 책을 읽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최근에 내가 주로 읽어온 책들은 짧고 간결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터넷 글에서 파생된 것이 많았다. 그런 책들은 무척이나 친절해서 읽기 쉬웠고, 심지어 각 장마다 핵심을 요약해서 다시 읽게 해 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러한 배려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애초에 어떤 독자를 위한 글이 아닌, 저자 스스로에게 말하는 명상의 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역자가 달아놓은 각주는 엄청나게 많았다. 책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명, 용어, 그리스어 번역 등의 내용들을 해설해 주고 있다. 하지만 있으나 마나였다. 배경 지식이 부족해서 각주와 해설을 읽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쁨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당신이 자주 보았던 것입니다" 라며 자문 자답하기도 하고, "네가 미덕에 반하는 무언가를 하거나, 세상의 이치에 어긋난 무언가를 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한 그 일이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철학적인 고찰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생각의 깊이를 요구한다.
저자의 솔직한 명상에서 드러나는 내면의 단단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글은 한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생각의 흐름이 끊기는 순간들이 많았고, 이는 전체 맥락을 위주로 이해하는 나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그 의미를 해석하고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 이것은 마치 정말로 '꼭꼭 씹어서' 삼켜야 하는 책 같았다.
나는 어떤 장르의 책이든 소설 읽듯 한 번에 몰입해서 읽는 독서를 가장 좋아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게 안 됐다. 평소 하던 독서와 정반대로 읽어야 했기에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고통과 끊김의 독서 과정에서도, 저자의 내면세계가 얼마나 단단한지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내면의 요새는 흔들리지 않는다. 외부로부터의 공격은 네가 허락하지 않는 한 들어올 수 없다." 그의 이 말은 자아의 안정과 통제를 강조하며, 그의 철학적 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누군가 지금 무슨 생각 중이냐고 물었을 때, 솔직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생각만을 하라"는 표현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생각이라면 아예 하지도 말라는 의미인데, 이 말을 읽으면서 나는 내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부정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어쩌면 진정한 내면의 단단함이란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거대한 로마 제국의 황제임에도 그는 자신의 행동뿐 아니라 생각조차도 엄격하게 통제하고자 하는 태도를 지키고 있었다.
죽음과 미덕, 그리고 '보류 조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죽음을 여러 차례 언급하며, 수많은 위인들조차 결국 무로 돌아갔음을 강조했다. 이 책이 전쟁터에서 주로 쓰인 것을 생각하면, 아마 자신의 죽음도 충분히 생각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과 죽음, 미덕에 대한 고찰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자신을 '일국의 제왕'이 아니라 '우주의 시민'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는 우주의 일부이다. 하나의 전체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의 삶은 우주의 운명과 함께 흘러간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보다 큰 우주의 일부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어찌 보면 불교의 정신과도 연결이 되는 것 같다. "모든 것은 순간이며, 모든 것은 변한다."라고 말하며 그는 이 무상함 속에서 집착을 내려놓고 내면의 평정을 찾으려 한다. 죽음을 회피하기보다 그것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생사를 초월하여 더 본질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고 있다.
책의 각주에 있는 해설을 통해 알게 된 말로, D.V.라고 요약해서 적기도 한다는 "데오 볼렌테" (Deo Volente)는 라틴어로 "하나님이 원하시면" 또는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주로 사용되며, 미래의 계획이나 소망을 이야기할 때 그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신의 뜻에 달려 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또한 모사재인 성사재천과 같은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종대왕을 떠올리다
유학자들보다 더 유학에 정통했던 세종대왕처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당대의 철학자들보다 더 철학자에 가까웠다. 두 지도자는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서 살았지만 놀라운 유사점이 있다. 우선, 두 사람 모두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통치자보다는 철학자이자 학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으며,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국가를 태평하게 잘 다스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명상록에서 드러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을 실천하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있다. 정치 철학에 있어서는 '시민들의 행복을 위해 왕정이 존재함'을 밝히고 있다. 세종대왕 또한 당시 유학자들보다 훨씬 깊이 있는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으며, 궁극적 목적은 백성들의 행복한 삶이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과, 법률 및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자 했던 것도 모두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에서였다. 두 지도자 모두 전쟁을 겪으면서도 위기 속에서 내면의 평온과 나라의 번영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만 한글 창제와 같은 업적은 아는바 없지만, 이 책을 통해 철학적 고찰을 통해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이 와닿는다. 삶과 우주의 본질을 탐구하고, 그 과정을 통해 신과 닮은 본성인 지성을 지닌 모든 인간은 소중한 존재라고 결론짓는다. 세종대왕과 마찬가지로 그는 단순히 정치적 권력자가 아니라, 내면의 성숙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한 성실하고 사려 깊은 지도자였다..
마치며: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한 지적 성장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다. 또한 로마 역사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다. 로마에 5현제 시대가 있었다는 것도,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5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참고로 아들인 코모두스 황제는 폭군이 되어 결국 암살되었다고 한다.)
"사람은 환경의 노예가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판단의 노예일 뿐이다." 이 구절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철학적 사유가 현대에도 얼마나 유효한지를 느끼게 해 주었다. 책 한 권으로 많은 것을 배운 느낌이었다. 읽기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결국 이 책은 나에게 큰 지적 성장을 선사했다. 마치 고통스럽지만 몸에 좋은 운동을 한 세트 끝낸 기분이다.
쉽지 않았지만 끝까지 읽어낸 나 자신이 조금 뿌듯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철학적 사유의 중요성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단순한 지식을 제공하는 책이 아니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보면서 독자 또한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하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내면의 평온을 유지하고 우주의 질서를 온몸으로 느끼고 매일같이 실천하기 위해 애썼다는 점에서, 독자로서 부끄러운 감정을 느꼈다.
때로는 이런 어려운 독서 경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비록 괴롭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인내심도 길러지고(사실 몇 번을 욕하면서 중간에 책을 덮었지만), 지식도 쌓고, 영적인 성장도 할 수 있었다.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한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책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상욱의 과학공부" 리뷰: 과학을 몰라도 읽을 수 있는 과학 책 (14) | 2024.09.29 |
---|---|
신지수,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 리뷰 : 같은 경험을 한 저자의 이야기를 읽다. (7) | 2024.08.20 |
구병모 작가 외, 단편 소설집 "불안의 주파수" : 불안이 없는 삶이 가능할까? (26) | 2024.07.31 |
박용철, "감정은 습관이다" 리뷰 : 큰 스트레스는 작은 즐거움으로 풀어라. (28) | 2024.07.19 |
피터 베르,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 불교의 가르침을 명상으로 배우다. (8) | 2024.06.29 |
한근태, "고수의 질문법" : 질문에 대한 저자의 지혜를 모은 책 (3) | 2024.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