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이 책은 제목처럼 '불안'과 관련한 다채로운 단편 소설들을 엮은 책이다. 미스터리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도 있었고, 만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소설도 있었다. 한편 마치 실제 경험담을 적은 것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
일곱 청소년의 불안을 그린 작품들이 무지개처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각기 다른 색을 가진 이 작품들을 읽는 것은 매우 즐거웠다. 문학의 매력은 다른 주파수의 파동을 경험하면서 나의 주파수가 함께 증폭되는 데에 있다.
어릴 적 '경찰청 사람들'이나 '사건25시'와 같은 TV 프로그램을 본 후에는, 나는 불안감에 몇 번이고 문을 잠그곤 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살인범이나 강도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정말 두려웠다.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문이 잠겨 있는지 확인했다. 남들이 보기에 비현실적이고 이상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바로 불안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바로 그런 상상력이 가미된 비현실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 저자
- 구병모, 김진나, 송미경, 오문세, 최상희, 진형민
- 출판
- 문학동네
- 출판일
- 2018.09.21
내가 찾은 이 책 속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징
일곱 작품은 나름의 독특한 매력을 지닌다. 공통점은 주인공이 청소년기라는 것, 그리고 불안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외에도 찾은 공통점을 정리해 봤다.
첫째, 작품 속에서 주인공을 지지해주는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불안을 겪는 주인공들은 모두 청소년이다. 그런데 이들의 불안을 해소하도록 돕는 가족은 비중이 없다. 아예 가족이 없는 채로 나오는 경우가 절반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작품에서도 가족들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하거나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키는 존재로만 나온다.
어쩌면 오늘날 가족의 현실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흔히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에서 가족은 주인공을 돕는 역할이나 지켜야 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 작품 속에서의 가족은 달랐다. 주인공이 겪는 불안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가족이 아예 부재인 상황으로 나타냄으로써 각 작품 속 주인공들의 불안이 더 증폭된다.
나는 학창 시절 친구의 오토바이를 빌려 탄 적이 있다. 그리고 넘어져 크게 다쳤다. 내가 직접 경험했기에 오토바이가 위험한 것을 안다. 하지만 이 책의 첫 작품 「헬멧」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불안은 오토바이를 타는 행위 자체의 위험이 아니다. 물론 사고 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부모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 돈을 벌어먹고살아야 한다는 불안이 더 크다. 그렇기에 위험한 오토바이 배달을 계속하게 된다.
「어디에도 있는」 에서 주인공의 엄마는 주인공보다 오히려 더 불안해 보인다. 오래 키운 강아지가 죽었다는 이유로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 상태로 나오고, 주인공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딸_상실한 구역」에서 감옥에 갇힌 주인공의 엄마는 14살의 상태 그대로인 것으로 묘사된다. 어른이 되지 못했다. 결국 '엄마'라는 단어를 내뱉고 싶은 갈망과, 엄마의 부재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주인공은 광적으로 피아노 연주에 몰입하게 된다.
나 또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광적인 게임을 한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광적으로 독서를 하기도 했다. 그 순간만큼은 불안을 잊을 수 있다. 하지만 완전히 도망치지는 못했다.
둘째, 어른들이라고 불안을 극복하지는 못한다.
어쩔 수 없이 불안과 함께 살아가거나, 도망치거나, 회피하며 살아간다.
삼성의 이재용 회장이 기업의 미래와 현재 상황을 생각하면 한없이 막막하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각자의 불안은 모두 각자의 무게가 있음을 떠올리게 됐다.
「헬멧」 에서 등장하는 유일한 어른인 박사장 아저씨를 보자.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먹고살 걱정'에 무대책이다. 운영 중인 가게는 망하기 직전으로 나온다. 작품 속 대사를 보면 "그래도 요즘 박사장 아저씨 같은 사람 없다"라며 좋은 사람으로 그려낸다. 박사장 아저씨의 불안도 주인공 못지않을 것이다.
「단추인간 보고서」 에서 몸에 단추가 생긴다는 이상한 설정, 그리고 단추인간에 대해 파고 들어가는 주인공은 왜 그토록 단추에 집착했을까? 그것은 단추를 뜯어내고 허물을 벗지 못한 채 죽은 엄마에 대한 따뜻하고 아픈 마음 때문이다. 자신의 허물을 끝까지 벗지 못한 채 살아가는 어른들이 많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셋째, 불안은 삶의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요소다.
어떻게 자신의 불안을 대하느냐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혹자는 타인에게 의존함으로써, 혹은 목적 성취나 오락에 몰입함으로써 극복해 나간다. 약물이나 술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간에, 자신의 불안은 스스로 떠안아야 한다.
피트 데이비스의 《전념》 에서는 불안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으로 '헌신'을 권유하기도 했다. 한편 《후회없음》의 저자 댄 히스&칩 히스는 '반복 노출 전략'을 통하여 불안을 극복하라고 조언했다.
(책의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두 글의 링크를 첨부한다)
2023.04.04 - [책 리뷰] - (책리뷰) 《전념》 by 피트 데이비스 : 예리한 문제의식과 폭 넓은 사례들
2023.09.08 - [책 리뷰] - 댄 히스&칩 히스, "후회없음"(DECISIVE) 책 리뷰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불안이라는 감정을 다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불안은 삶의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구병모 작가의 「유리의 세계」 에서는 이런 불안의 필연성과 본질성을 유리의 이미지로 표현했다. 유리는 본질적으로 깨지는 존재다. 작품 속에는 그것을 잊고 안정감을 얻으며 살아가는 어른들이 나온다. 하지만 어린 소년 '문'은 유리는 본질대로 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견고함은 영속성을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말에는 결국 애써 불안을 잊은 것처럼 살아가지만 삶의 본질인 불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안을 다루어야 할까?
나의 나쁜 독서 습관이 도졌다.
그것은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답을 알려달라'는 심리적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엮은이는 책 마지막에 문학 작품의 의도는 '이렇게 하면 된다' 라는 식으로 가르치고자 함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저 '질문'을 해 보기를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독서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갈구한다. 나는 김영하 작가의 작품을 읽고 나서도, 불만의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데?'라며 해답을 요구했다.하지만 결국 이 작품에서도, 아니 모든 문학 작품에서 같은 답이 돌아올 뿐..
물음표를 알려줬으니, 해답은 니가 알아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법이 필요한 순간」은 결말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삶에서 마법이 필요한 순간은 항상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루어진 그 마법으로 인해 불안이 발생했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세상을 멈춰버리고 난 후, 다시 돌아온 세상에서 감사함을 느낀다. 순간의 욕망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음을 '마법'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깨닫는 과정을 보여줬다.
결국 불안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불안을 승화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읽고 떠올려 본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이 책의 끝에는 엮은이의 '당부의 말'에는 좀 더 교술적인 내용의 글이었다. 불안은 필연적이며 우리를 경직시키지만, 우리를 지켜주고 성장시키기도 한다는 내용이었다. "불안은 괴물이 아니며, 까칠한 친구일 뿐입니다"라는 표현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마치며: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불안이다
이 책은 일곱 명의 청소년들이 겪는 불안에 대해 다루고 있다. 소설이 아닌 현실 속에서도 어른들은 종종 청소년들의 불안을 크게 도와주지는 못한다. 이는 각자의 불안과 경험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내 삶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불안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내 불안을 털어놓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괜찮아, 별것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 또한 불안에 있어서만큼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느낌이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불안이다."
서정주 시인의 작품 '자화상'의 문구를 살짝 바꿔 보았다. 내 삶을 잘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왔다. 특히 남들보다 불안에 더 민감한 편이다.
내 삶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불안은 번번이 내 발목을 잡아왔다. 수능 시험에서 답안을 밀려 썼다. 운전면허 도로 주행 시험도 평소와 달리 당황하면서 떨어졌다. 군대 신병훈련소에서는 중대장 훈련병 후보로 뽑혀 연습하다가 정작 마지막 리허설에서 절차를 새하얗게 까먹어 탈락했다. 자격증 시험 때도 1번 답안을 밀려 썼다. 입사 면접 당시에는 바들바들 떨면서 면접을 봤고, 떨어진 경험이 있다. 내 모든 실패의 순간을 돌아보면 항상 불안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했다며 자책했다. 내 불안 민감성을 증오했다. 불안은 내 삶 최대의 적이었다. 그리고 직장을 갖고 사회 생활을 하는 지금도 온갖 불안감을 느낀 채 일한다. 혹시 나에 대해 오해한 것은 아닌가, 욕을 먹으면 어떡하나 하는 온갖 불안감을 느낀다.
불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청소년과 성인의 차이점은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많이 겪어봤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은 전후 세대의 사람들과 IMF 세대의 청소년들이 가진 불안보다 작은 불안을 살아가고 있을까? 비록 일제시대나 전후시기, 민주화 운동 시기와 달리 정치적 억압이 없고 경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 풍요롭고 편한 시대다. 하지만 불안의 무게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불안에 인생 자체가 흔들릴 나이는 지났다. 그럼 내 뒷 세대의 젊은이들의 불안은 어떻게 공감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아직도 남은 내 불안을 떨치려 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인가?
많은 물음표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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