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며
이 작품은 사연이 많은 소설이다. 체코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작가는 결국 프랑스로 귀화해서 프랑스어로 작품을 출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작품의 배경에는 동유럽 공산주의 사회의 살벌한 분위기가 깔려있다. 서로를 감시하고, 회의를 통해 '자아비판'을 하고, 사회주의에 맞도록 인민들을 교육하려고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그런 공산당 소속의 엘리트 대학생이었다. 영리하고, 민첩하며,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다.
그러던 중 사귀던 여자 후배에게 '농담'을 한 것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면서, 모든 것을 잃고 전락하게 된다. 이 작품은 그 전락의 과정과, 전락 이후 주인공의 복수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처음에는 가볍게 읽게 하다가, 점점 묘하게 몰입시키는 솜씨였다.
항상 소설을 몰입해서 읽고 나면 온갖 생각이 든다. 이 생각들을 정리해 나가는 것이 책 자체를 읽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이 작품도 그랬다. 생각이 잘 정리가 되지 않는 가운데 썩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 느낌이 뭔지 정체를 밝히기 위해 글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2. 이미지가 실제를 지배하다.
책을 다 읽고나서 제일 먼저 적은 메모는, "농담 함부로 하지 말자"였다. 사실 주인공의 농담은 좀 과했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았고, '모든 것에 진지한' 상대방의 성향을 간과했다. 루드비크는 자기의 이미지를 위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그의 삶을 파괴하는 칼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아무리 농담이었다고 말을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시대와 사회의 '금기'를 건드린 농담의 대가였다. 상대가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인다면 웃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그런데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경우가 많다. 내 경험상 이러한 경우 대부분은 '웃자고 말한 사람'이 잘못이다.
이 작품의 최대 묘미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나름의 '믿음'을 가지다가 그것이 깨져 버리는 순간들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사실보다는 이미지를 믿는다. 작품의 주인공 루드비크는 편지로 농담을 한 것 때문에 반공 분자로 몰려 15년 동안 유배된다. 평소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유배기간 중 '순결한 여자'라고 '믿는' 루치에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한편 헬레나는 루드비크가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며, 운명적 사람이라고 믿는다. 코스트카는 모든 불행을 신의 계시라고 믿는다. 그리고 야로슬라프는 자신이 민속 행사의 가치를 전하는 마지막 계승자라고 믿는다.
위의 문단에서 공통점을 발견하였는가? 모든 사람은 결국 무언가를 '믿는다'. 그들에게는 그 믿음이 곧 현실이다. 그런데 믿음의 대상은 결국 자신이 만든 이미지인 것을 독자들은 알 수 있다. 모든 비극은 자신이, 혹은 타인이 만든 이미지나 개념을 현실이라고 과하게 믿고 집착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러다가 그 이미지와 현실이 다름이 드러나는 순간,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런 이미지의 지배는 소설 밖 현실 세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나의 삶도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다. 실제로 사람들도 모두 어떤 '믿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믿음이 허상임을 알지 못하고,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그것이 우리 삶을 비극이나 희극이 되도록 한다. 일론 머스크가 '세상은 가상현실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40년대 동유럽은 모든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에 현실을 맞추어야 했던 시대였다. 작가는 그러한 사회 분위기에 대한 '농담'을 던진 셈이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억울하고 슬프며, 고뇌하는 신세다. 그것이 허상에 가까운 믿음 때문임을 작가는 독자들에게 거리를 두고 보게 해 주었다. 나는 그 '거리두기'에 실패했지만 말이다.
3. 이미지 관리를 기가 막히게 잘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작품속 주인공의 친구이자 '원수'인 파벨은 시대 흐름을 읽는 영리한 사람이다. 주인공 및 다른 인물들과 구별되는 이 사람의 특징은 특정 이미지나 개념에 집착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인물들의 문제는 이미지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인생이 휘둘려 버린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믿는 이미지에 집착하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착각하고 휘둘린다. 그런데 파벨만은 능숙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한다. 시대에 맞게, 흐름에 맞는 옷을 갈아입듯이 자신의 이미지를 갖추고 생각과 행동을 그것에 맞출 줄 안다.
또 다른 대조적 인물로 코스트카가 있다. 그는 모든 불행을 '신의 계시'라고 믿고 행한다. 스스로의 신앙에 확신을 갖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자신이 혹시 '합리화'를 하고 있는지 의심한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 신을 부르짖는다.
이들의 모습은 주인공과 닮았으면서 또 다르다. 파벨은 '얄밉게' 그려진다. 코스트카는 '얄미운 듯'하지만 또 동정이 가는 인물이다. 파벨이 완전히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라면, 코스트카는 자신의 신앙이라는 믿음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회사에 보면 스스로 '일 잘하는 사람' 이미지를 잘 만드는 녀석들이 있다. 자기 잘못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고, 남 잘못은 사사 건건 드러내는 P가 떠올랐다. 그는 '이쪽에서 실수했을 가능성은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실제로 실수가 적긴 하다. 하지만 자기 실수인 적도 있었다) 그 녀석은 나보다 나이도 어린 선배였다. 게다가 후배에게는 막 대하면서, 선배에게는 또 형님형님 하면서 착한 후배 역할을 잘한다.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 있나? 생각했다.
나는 거꾸로다. 후배에게는 조심스럽고, 선배에게는 친해지기가 어렵다. 내일이 있어도 누가 일을 도와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못한다. 젠장, 역시 녀석이 얄미운건 어쩔 수가 없다. P는 절대 도와주지 않는다. 자기 일 끝나면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 정작 나는 이일 저일 도와준답시고 허둥지둥하다가 실수해서 안 도와주니만 못한 경우도 있었다. 정작 내 일도 완벽히 못하면서.
그렇게 P는 일 잘하는 사람의 이미지, 나는 일 못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완성됐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내가 얄밉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옹졸한 마음이다. 나는 '절대로 저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들을 '얄밉다'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그렇다. 결국은 이미지도 능력이다. 얄밉다는 이 감정은 시기와 질투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파벨보다는 루드비크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4.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내가 가장 화를 낸 적을 떠올려 보면, 대부분 '억울한' 경우였다. '오해'를 받는 것에 민감하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나에대한 사람들의 '믿음'에 예민하고, 나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아끼는 어머니조차 내 진심을 몰라주고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이 문제다.
그렇다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점에 대해 생각하다가,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나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데 바로 위에서 이미지 관리 능력에 대해 써놓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보여야 한다니 앞뒤가 안 맞는 건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40대가 되어서도 이런 고민을 하고있는 내가 웃기게 느껴진다. 이러한 것들은 사춘기 때 했어야 했는데, 나는 사춘기를 거의 겪지 않고 성장했다. 아니, 성장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이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어야 한다. 내 감정도 모르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편이다.
이와 관련해서 밀란 쿤데라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는 장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깨우침을 준다. 코스트카가 전해준 이야기도 결국 그의 믿음에 의해 왜곡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루치에가 자신을 거부했던 것은 '순결한 소녀'라는 주인공의 믿음을 실망시킬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와 관계되지 않은 부분까지도 완전히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진정한 사랑이며,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문장이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전달하기 위한 이야기를 짜낸 작가가 존경스러웠다. 그냥 직접적인 말로 했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나와 닮은 듯 다른 주인공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의 매력이다. .
조금 더 생각해 보았다.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나를 버리고 상대에게 온전히 충실한 태도가 필요하다. '이해받고자 하기보다는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 이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왜곡되는 기억 속에서 나의 모습은 계속 변화한다. 나 자신도 잘 모르는데 남을 어떻게 있는 그대로 온전히 볼 수 있을까?
그런 기적 같은 일을 계속 시도하는 것이 진정 가치있는 일임은 책이 아닌 내 삶에서 여러 번 겪었다.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만으로도, 공감이 만들어지고, 관계가 돈독해진다.
지나온 내 삶에도 그러한 소중한 순간들이 아주 가끔씩, 찾아오곤 했었다.
5. 마치며: 인생은 종종 우리에게 못된 농담을 건넨다.
정말 잘 읽은 소설이었다.
작품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주인공의 억울함과 찌질함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는 이 작품에 내 삶을 투사하며 읽은 것이었다. 사실 나도 어린 시절에는 이 작품의 주인공 같았다. 생각이 예민하고 빨랐다. 내 판단에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또한 지적 오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종종 순진한 친구들에게 '못된 농담'을 던지고는 했다. 당시 악의는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 놀려먹는 별로인 놈이었다.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은 전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분명 지금처럼 착한 사람 콤플렉스 지닌 다루기 편한 놈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 잘난 맛에 사는 놈이었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운명과 인생이 참교육을 해 주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 삶의 첫 시련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이별이었다. 본인의 삶을 갈아 넣으며 홀로 두 아들을 키워내는 어머니를 위해 독하게 마음을 먹고 좋은 아들이 되려고 애썼다. 하지만 계속되는 실패와 불행이 점점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나는 생각에 확신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주관도 사라진 것 같다. 다행인 것은 못된 농담을 하는 습관도 사라졌다는 점이고, 웃긴 것은 변한 이후로 이런 나를 주변에서 더 좋아한다는 점이다. 정작 나는 변해버린 나를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다. 작품 속 루드비크 말한 '서글픔 섞인 우스꽝스러운' 상태가 아닐 수 없다.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혹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삶은 내게 농담을 건넸다.
나는 그 농담에 놀아나는 어리섞은 '애새끼'의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 애새끼, 딱 그 모습이었다. 농담에 대처하는 법을 나는 알지 못했었다. 삽질을 하고, 뻘짓을 하고, 때론 비열한 짓을 하며 내 밑바닥을 드러냈다. 마지막 남은 자부심마저 망가뜨리기도 했다. 그래도 개X끼가 되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루드비크 또한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고, 항변하고, 망가져 버리면서도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고집을 부리는 것까지 나와 비슷해서 더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다 복수의 기회가 오자 처절하게 복수를 계획한다. 그리고 그것이 거의 성공했다고 생각할 때 즈음에, 인생은 또다시 못된 농담을 던져버린다. (스포일러라 구체적으로는 밝히지 않겠다.)
김영하 작가님은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연쇄살인범에게 찾아온 알츠하이머를 '인생이 건네는 짓궂은 농담'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 작품에서 주인공 또한 왜곡된 기억 속에서 처절하게 자기 자신과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인생이 행한 못된 몰래카메라에 그저 쓴웃음을 지어줄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담담히 받아들인다.
나는 그런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냥, 삶이라는 녀석이 이제 못된 농담은 안했으면 좋겠다. 좋은 소식만 건넸으면 좋겠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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