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20년 전의 미제 살인사건을 재수사하면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보여주는 책이다. 책은 2권으로 되어있지만, 시종일관 구체적이면서 분명한 묘사와 서술 덕분에, 마치 영화를 관람하는 것처럼 잘 와닿았다. 그래서 몰입감이 좋았고 다른 책 1권을 읽는 것보다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더할 나위 없는 추리소설이었지만 묘한 아쉬움도 남는다. 작가는 시점을 섞고, 장을 섞어 구성한 서술 장치를 이용해 독자를 속아 넘겼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깊게 생각해야 할 것 같은 내용도 많았고 범인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하다가 어느 순간 '속았다'라는 느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뒤처리를 완벽하게 해내며 결말까지 이루어 내는 것이 일류의 솜씨를 보여준다. 그것이 독자를 속여 소설의 재미를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더 깊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 저자
- 장강명
- 출판
- 은행나무
- 출판일
- 2022.08.22
뛰어난 디테일로 창조된 작품 속 인물들
작가는 이 작품을 위해 오랜 기간 준비했다고 한다. 순전히 상상만으로 이런 작품을 창조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수사과정을 지켜보지는 않았을 텐데, 수사 준비 회의 과정부터 시작해서 수사 진행 과정이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증거의 수집과 검토, 그리고 탐문까지.. 정말 실제로도 이렇게 수사가 이루어지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을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게 만드는 정도라면, 이는 소설가로서는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닐까?
특히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가 하나하나 모두 개성이 살아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주인공 연지혜는 매우 냉정하지만 그것이 티 나지 않고, 또한 성격을 잘 숨기는 성격이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선배 형사의 성격은 주인공과 대조되면서 그 개성이 드러난다. 이러한 설정들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았고,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에 대해 납득하게 만든다. '유별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피해자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도 '아, 어떤 애인지 알겠다'라고 생각하며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용의자 후보들의 성격들도 모두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 개성을 드러내는 데에 긴 지면을 할애하지 않고 사건 전개와 함께 보여주는 효율적인 진행 또한 놀라웠다.
시점을 섞고 화자를 바꾸다
이 작품은 장의 구성별로 화자의 시점이 뒤섞어서 제공된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범인의 서술과,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여주인공에 의한 수사 과정이 그것이다. 사건 전개는 주로 여주인공의 수사 진행과 함께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성은 두 가지 효과를 가져온다. 우선 장면을 끊고, 독자들에게 숨 고르기를 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작품을 읽으면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정리하면서 읽어나갈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로는 작품 전체에 개연성을 부여하게 된다. 다시 말해 범인과 형사라는 대립구도에서 범인의 입장에도 귀를 기울일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범인의 관점에서 서술된 부분이 독특했다. 나름 철학적이고 깊은 사색의 결과들을 서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스트예프스키의 작품 세계, 근대 계몽주의의 한계, 인지 편향에 관한 연구결과, 넛지와 자본주의에 관한 비판 등 깊이 있고 그 범위도 넓다. 범인은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한 사람이다. 자신의 범행에 대한 합리화를 하면서 사법 시스템에 대한 생각 등을 드러내는데, 그 논리가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이러한 부분을 읽으며 필자는 자연스럽게 '범행 동기'에 대한 호기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이며, 왜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범인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주인공과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마치며 - 너무 그럴듯해서, 뻔뻔한
후반부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범행의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사실 이 부분이 조금 실망스럽지만, 작가는 뛰어난 솜씨로 개연성을 부여했다. 어쩌면 우리 삶은 결국 우연히, 돌발적으로 일어지 않는가? 그리고 모든 범죄에는 모두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것에 충실한 것이 앞에 말했던 범인의 서술이었다.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이지만, 결국 범행 동기는 우발적인 것이었고, 그 긴 독백들은 자기 합리화였음으로 판명된다.
여러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범인의 생각은 정말 자신의 범행의 합리화의 목소리에 불과했던 것일까? 굳이 그렇게 긴 지면을 할애해 가면서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 비하면 너무 범죄와의 관련성이 적었다. 필자가 내린 결론은 결국 '작가에게 당했다'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아마 독자로 하여금 작품에 빠져들게 하기 위한 , 반전을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결국 각 장에서 나타났던 주장과 의견들은 평소 작가의 문제의식과 사색들이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작가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많이 읽은 것 같다. 범인의 독백으로 활용하면서 자신의 정리된 생각과 시각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마치 자신이 '범인인 척' 출연한 셈이다. 자신이 출연하여 독자를 속이는 소설이란, 참 뻔뻔하기 그지없다.
20여 년간 숨어 살았던 범인 못지않게 작가는 뒤처리를 깔끔하게 해낸다. 용의자들의 증언들을 통하여 통해서 뿌렸던 떡밥을 남김없이 회수해 낸다. 사실적이어서 몰입도와 완성도가 높고, 개연성도 있게 말이다. 결말 부분의 세련된 장면 묘사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사실 그래서 이 책과 작가가 더욱 뻔뻔하게 느껴진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너는 더 뻔뻔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뻔뻔한 사람이 잘 산다나.
이 책은, 참 뻔뻔하게도 재미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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