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학창 시절의 라이벌, K를 생각하다.
학창 시절 K는 항상 가장 늦게까지 남아서 공부하는 녀석이었다. 나는 그 친구 옆에 붙어서 따라 남아서 선의의 경쟁을 했다. 녀석은 언제나 1등이었고, 나는 2등이었지만 가끔 함께 농구 1:1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너는 무슨 학과에 진학할 거야? 대학을 졸업하면 뭘 할 거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수학능력시험이 100일 남은 상태였지만, 나는 대학교에 학과가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냥 시키는 공부만 하던 학생이었다. 그 친구는 내게 말했다. 자신은 한양대 금융공학과를 가겠다고. 그리고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따고, 그 이후에는 기업 사냥꾼이 되겠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기업사냥꾼이 뭔지 몰랐지만 궁금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대답하고 영단어를 하나 더 외우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수능을 망쳤다. 그 해 수능 시험은 언어영역이 매우 어려웠다. 나 역시 평소보다 시험을 못 봤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인서울 대학은 갈 수 있었다. 대신 점수에 맞춰서 학과를 선택했다. 반면 그 친구는 한양대 금융공학과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재수를 선택했다. 그 해 수능만 생각하면 내가 녀석보다 더 성공한 셈이었다. 일단 나는 급한 불을 껐다.
그 친구와 다시 연락을 하게 된 건 3년 뒤였다. 대학 1학년을 놀면서 보낸 나는 군대를 다녀왔고 장래에 대한 고민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네이트온을 켰는데, 그 친구가 반갑게 말을 걸었다.
충격적인 것은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녀석은 대학 2학년 때 이미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딴 상태였다는 점이다. 나는 그 친구에게 강한 자극을 받았고, 내 갈길을 찾은 느낌이었다. 전문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30대가 될 때까지 합격하지 못했다.
녀석은 자신의 원대한 포부가 있었기에 재수 생활도 이겨내고, 원하던 대학과 학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20대 초반의 나이에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기업사냥꾼'이라는 목표에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수험생활 이후 그 친구와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나보다는 잘 살고 있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K와 나는 이미 대학 진학 전부터 '싹수'가 달랐다. 녀석은 이미 인생의 계획을 수립하고 그에 맞게 수능 공부를 했다. 반면 나는 수능시험을 잘 쳐서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눈앞의 근심에만 집중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선택이 이후 내 20년의 걱정을 만들었다. 결국 나는 30대가 넘어서까지 방황했다. 제약회사 영업사원을 비롯하여 이것저것 도전했지만 고생만 하고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다.
나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공자님 말씀과 안중근 의사의 가르침을 그때 알았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
인무원려(人無遠慮), 필유근우(必有近憂)
공자님이 말씀하신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사람은 멀리 생각하여 염려함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시일 내에 근심이 있게 된다. 멀리 길게 내다보는 생각을 하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 출처는 논어집주 위령공편 제11장이다.
이 말을 더 깊게 생각해 보았다.
'인무'와 '필유', '원려'와 '근우'가 대칭되면서 인과율을 설명하는 아름다운 말이다. 첫 네 글자에서는 '없다면'의 조건을 말하고, 다음 네 글자에서는 '반드시 있다'는 결과를 설명한다. 원려(遠慮)에 대해 '멀리 염려하다'라고 직역하기보다는 원대한 포부, 장기적인 계획, 멀리 보는 시야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근우(近憂)란, 가까운 근심이라고 직역하게 된다. 이는 눈앞의 어려움, 급한 일에 급급하게 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인무원려(人無遠慮)란, '사람이 원대하고 장기적인 계획이 없는 경우'라는 조건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그리고 필유근우(必有近憂)란, 장기적 사고의 부재로 인하여 '반드시 눈앞의 걱정에 급급하게 된다'는 말이다. 결국 '인무원려(人無遠慮) 필유근우(必有近憂)'는 삶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과 멀리 보는 시야 없이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눈앞의 급한 일이나 근심에 급급하게 된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내 친구 K 말고도, 인무원려 필유근우를 실천한 사람 중에는 유명한 사람도 있다.
손흥민을 만들어낸 아버지 손웅정의 교육 철학
인기 TV 프로 '유퀴즈'에 손웅정 씨가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계적인 축구 스타 손흥민의 아버지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성공적인 선수가 되었을까? 그의 성공 뒤에는 그의 아버지 손웅정의 교육 철학이 있다.
손웅정은 손흥민이 16세가 될 때까지 슈팅 훈련을 시키지 않았다. 그 대신 기본기 훈련에 집중하게 하였다. 당장 슈팅을 잘하면 득점을 하고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으면 큰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것이 슈팅 훈련과 무슨 상관일까?
손웅정은 "인무원려 필유근우"라는 말을 인용하여 슈팅 훈련을 시키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강력한 슈팅 훈련으로 인하여 아직 성장기 소년의 여린 관절이 상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손흥민 선수가 30대가 된 지금도 전성기의 폼을 유지하면서 탑 티어의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자기 관리가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유년기 시기부터 '선수 생명' 이라는 장기적 염려를 잊지 않고, 체계적으로 훈련했기 때문이다.
스티븐 코비의 3번째 원칙, 중요한 일을 먼저 하라
스티븐 코비는 저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2번째 원칙으로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3번째 원칙으로 '중요한 일을 먼저 하라'고 말한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 '시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일', '중요하지도, 시급하지도 않은 일'의 네 가지 유형으로 업무를 나누었다. 그리고 '중요하지만 시급하지는 않은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처음에 왜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아닌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일'에 시간을 많이 쓰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이미 벌어진 일이다. 또한 중요하고 시급하지 않은 일이 누적되어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장기적 관점을 가져 후자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함으로써 '중요하고 시급한 일'의 발생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물론 어려운 일도 닥치고 좋은 일도 있겠지만, 우리는 종종 눈앞의 어려움에 사로잡혀 고통스럽다고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 어려움은 우리가 평소에 염려하고 관리해 둔다면, 그리고 스티븐 코비의 원칙 2처럼, 원대한 비전을 잊지 않고 있다면, 사실 생각보다 큰 어려움은 아닐 수 있다.
이러한 지혜를 찰리 채플린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말이 갖는 의미도 새롭게 해석해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오버뷰 이펙트'와 '마시멜로 실험'
오버뷰 이펙트는 예전에 빌 게이츠의 블로그에서 알게 된 말이다. 조망효과라고도 불리는 '오버뷰 이펙트'는 우주선을 타고 다녀온 우주 비행사들이 겪은 인식의 전환을 설명한다. 이 효과는 우주에서 지구를 봤을 때 느끼는 통찰을 이야기한다.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에서 바라본 지구는 무척 아름다우면서, 지구에 대한 경외감과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였다.
우주적 관점을 가지면 우리의 인생의 걱정은 먼지와 같이 작은 것이다.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 삶은 더욱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한편 스탠퍼드 대학의 심리학자 월터 미셀은 '마시멜로 실험'이라는 유명한 수십 년간의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 실험은 어린아이들에게 당장 마시멜로 한 개를 먹을 수 있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두 개를 먹을 수 있다는 선택을 제시하였다. 실험이 끝난 후, 장기적인 보상을 선택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더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경향을 보였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러한 실험 결과에 대해 비판과 반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장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결국에는 더 큰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마치며: 나는 멀리 염려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오늘 글에서는 나의 과거 경험을 시작으로 공자와 안중근의 인무원려 필유근우, 오버뷰 이펙트, 마시멜로 실험, 스티븐 코비의 원칙까지 이야기해 보았다. 잡다하게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지만, 모두 한 가지 교훈을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장기적인 비전을 가져야만 작은 걱정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지나온 내 인생에 후회는 없다. 나도 나름 매 순간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 다만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지난 인생 동안 나는 장기적 계획보다는 눈앞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데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나는 아직도 '인무원려' 상태는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내 삶의 가장 끝은 어떨까? 그리고 시급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결국 내 삶의 끝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삶의 절반을 살아온 지금에서야 멀리 생각하는 것이 늦은 감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집중하려 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해 보니, 편안하고 미소 지을 수 있는 죽음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단 한번의 생을 마무리하는 그 순간에 나는 육신의 고통도, 정신의 고통도 느끼고 싶지 않다.
웃으며 편하게 죽기 위해서는 우선 건강한 노인 상태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에 수년간 병원 신세만 지다가 죽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미소 짓는다는 것은 '여한' 이 없는 죽음을 의미한다. 40대인 지금도 나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한이 많이도 맺혔다. 이제부터라도 남은 삶은 한 맺힘 없이 살아가고 싶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잘 먹고, 잘 자고, 운동에 힘쓰며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하나씩 해보면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해야 할 일, 시급한 일, 중요한 일들을 해결해야 하기에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비록 방문자는 적지만, 내가 계속 책을 읽고 이 곳에 글을 쓰는 것은 내 삶과 함께 이곳도 성장시키겠다는 '원대한 포부'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멀리 염려하고 있는 생각이 있으신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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