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지심이 가진 관계 파괴력
사실 나는 대학 시절 사람들과 연을 끊은 지 꽤 오래되었다. 나의 대학 생활 대인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학생회 활동도 하면서 나름 활동적으로 지냈다. 군 복학 이후에는 학점관리도 열심히 했다. 학과 수업도 재미있었고, a+학점을 잘 받는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취직하지 못한 채로 공부를 꽤 오래 했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한 끝에, 대학 졸업장을 받는데 10년이 더 걸렸다. 그 사이 또래 선후배와 동기들은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면서 모두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대학 시절 인연 중 단 한 명 연락하는 사람이 있다. 그 형은 신림동 고시촌에서 수년간 함께 공부했던 동지이다.
대학 시절의 인연들은 핸드폰을 끄고 공부만 하던 내게도 결혼식 청첩장을 보내왔었다. 하루하루가 팍팍하고 전쟁과도 같았던 나는 당연히 참석하지 않았다. 그땐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나는 정말 고승덕처럼 공부했다. 그리고 당시엔 내가 정말 와 주기를 기대했다면 이런 식으로 연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와주길 바랐다면 밥이라도 먹자고 했겠지..' 하는 자기 합리화가 있었다. 나는 심지어 축의금도 보내지 않았다. 수험서도 헌 책방에서 사서 보는 마당에 3만 원 5만 원 보낼 돈조차 아쉬웠다. 그리고 '어차피 나도 저 사람들 안 부르면 되는 거니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로 인해 그들과는 더 연락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결혼식 참석 경험이 없었고, 많이 미숙했다. 인간관계에서 결혼식 불참이 무슨 의미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악순환이었다. A의 결혼식을 안 갔는데 이제 와서 B의 결혼식장에 내가 가면 A를 마주쳐야 한다. A를 만나면 나는 뭐라고 할 것인가? 그래서 B의 결혼식도 가지 않았다. C도, D의 결혼식도 그러했다. 그 이후로는 내 인간관계가 깔끔해졌다며 합리화한 채로 지냈다. 자격지심. 그것만큼 강한 파괴력을 지닌 심리적 에너지가 또 있을까. 열등감은 내 행동과 생각까지 통제해 버린다. 그래서 제삼자의 시선에서는 명백히 '지질한' 행동을 하게 된다. 나는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인생이란 기묘하게도 항상 우연을 가장해 모든 걸 돌려주곤 한다.
우연히 작가가 된 대학 동기의 글을 읽다.
예전 포스팅에서, 대형 학원의 강사가 된 지인을 유튜브에서 보았던 이야기를 했었다. 그의 모습은 나의 과거를, 내 실패를 떠올리게 했었다. 그런데 또 유명인(?)이 된 동기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번엔 영상이 아니라, 글을 통해서였다. 그녀는 카카오 브런치스토리 작가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종이 책도 출판했고, 여기저기에 강연을 하며 다니는 것 같다.
사실 이 동기와 같이 지낸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신입생 시절 1년 정도였다. 그녀는 나와 동갑이지만 학창 시절에도 누나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와 이곳에 글을 쓰고 있는 상황인지라, 나는 그녀의 글쓰기가 무척 궁금했다. 브런치 작가의 글쓰기를 보면서 글쓰기에 대한 배움도 얻고 싶었다. 그래서 새벽에 누워 그녀의 글을 염탐(?)했다.
참 글을 성실하게 많이도 올려놓았다. 이 정도 글을 쓰면 카카오브런치 작가가 되는구나 싶다. 차분한 글이었다. 자신의 이야기와 생각을, 담담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쓰고 있었다. 저자 약력을 보니 경력이 화려했다.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고, 또 작가로서의 길까지 가고 있는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열심히 사는구나'
실명으로 댓글이 달린다고?!
나는 응원의 댓글을 하나 달아주었다. 깊은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다. 글을 잘 읽었으니 보답으로, 또 오래전 결혼식을 못 간 미안한 마음도 들었기에 한 행동 같다. 그런데, 실명으로 이름이 떠 버린 것을 확인했다. 삭제하는 법을 찾으려 애썼으나 찾지 못했다. pc로 로그인하면 삭제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왠지, pc로 로그인하면 이곳 블로그까지 연결될 것 같아 망설여진다. 이곳을 공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지우긴 했다.
괜히 안 하던 짓을 해가지고..
젠장. 나는 비겁한 것일까? 그녀는 실명을 밝히고 당당히 글을 쓰는데, 나는 댓글 하나로 이렇게 지질한 모습을 보인다. 어쩌면 그녀는 내 이름 따위는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단 둘이 뭘 해본 기억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선 그게 최상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이름도 쉽게 잊기는 어려운 이름인 것이 또 마음에 걸린다.
특히나 그녀의 글들을 다 읽어버리고 나니, 이곳이 더 초라해 보인다. 또다시 자격지심이 나를 찾아온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생각. 지질한 모습의 대명사. 이 감정의 파괴력을 실감한다. 한편으로는 <악인론>의 저자가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인 손수현은 이 파괴력의 힘을 통찰했다. 이를 오히려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에너지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스승으로 승화시키라고 말한다. 책으로는 이해했던 것이 실제로 얼마나 힘든지 체감했다. 나는 열등감 앞에서 도망치고 숨고 싶은 마음만 드니 말이다. 그래도 나의 공간, 나의 블로그에 이 기록을 남겨본다.
이 나이 먹도록 자격지심을 다루기가 어렵다.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스트레스적 감정이기에, 공격적 반응을 일으키거나, 회피 반응을 일으킨다. 나는 후자 쪽에 가깝다. 비슷한 느낌만 들어도 도망치기에 바쁘다. 열등감 때문에 누군가를 비하하는 사람보다는 그나마 낫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지독한 자격지심 앞에 무력하다. 앞으로도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비교하자며 이렇게 뻐젓이 블로그 제목까지 달아놓고도 말이다.
<악인론>처럼 열등감을 나를 위한 에너지로 바꾸는 것을 시도해 보려고 한 적이 있다.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었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과 지나간 세월에 대한 열등감은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악인론>은 자신의 인생과 투쟁하기 시작하려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있겠지만, 내 삶과 슬슬 화해를 도모해야 할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책 같다.
또 다른 책에서는 자격지심의 다른 얼굴이 나르시시즘이라는 내용을 읽었다. 뼈 맞는 느낌이었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상정한 완벽한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하지만 현실의 불완전한 자신과의 인지부조화가 발생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현실의 자신은 오히려 부정하고 공격하게 된다.
어머니의 글쓰기, 나의 글쓰기
블로그를 개설해 드렸지만 글을 좀처럼 쓰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떠오른다. 자주는 아니지만 내 글을 읽으시긴 한다. 아들이 주식하는 것을 싫어하셔서 주식 분석 관련 글을 멈추게 되었다. 본인도 글을 쓰고 싶어 하실 것 같았다. 그래서 만들어드린 블로그에는 많은 글을 올리시진 않으셨다. 꽃 사진과 짤막한 글을 올리셨다. 아마도 컴퓨터와 핸드폰 사용의 장벽에 가로막히신 것 같다. 몇 개의 글을 쓰셨었는데 삭제해 버리셨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못 썼다는 이유에서였다.
"어차피 엄마 블로그에는 아무도 안 와요~ 조금씩 수정하면 돼요"
수정하기를 통해 고치면 되는데, 왜 굳이 다 삭제하시는 걸까? 아마 어머니의 자격지심일 것이다. 나는 어머니께 글을 쓰면서 부끄러운 자기 자신을 대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곧 좋은 글이 써지는 시작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도 못하면서..'라는 생각에 멈추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했던가, 원래 훈수는 쉬운 법이다. 이처럼 자격지심은 나 자신에게는 강력하지만, 주변에서 보면 뻔~히 보이는 비합리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인간은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감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공자는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고 하여 슬퍼하되 마음을 상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한 적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감정일기를 쓰고 있다. 그런데 이것도 웃긴 게 매번 같은 내용이 반복되니까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다. 여기에 또 '나는 감정에 나약해지는 사람인가?'라는 자격지심이 추가된다. 순순이가 아플 때도 그랬고, 감정을 추스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 일단 쓰자. 글쓰기를 계속하자.
밥을 먹으면 힘이 난다. 이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포도당이 우리 몸에서 에너지로 변환되는 과정은 10단계의 화학 변화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김상옥 님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을 읽다가 보았고, 인터넷 검색으로 더 공부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신기한 것은 이 10단계가 순차적이지만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우리 몸의 에너지 대사는 컴퓨터처럼 계산적이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화학물질을 다음 단계로 변환하는 효소를 1개씩이 아닌, 모두를 계속 내뱉을 뿐이다. 우리 몸은 포도당이 지금 현재 어떤 단계인가에 따라 다른 효소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몸속에서 분자 상태로 돌아다니던 물질들이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그때의 화학반응에 의해서, 다음 단계의 물질로 바뀌게 된다. 만약 화학 물질이 단 1개뿐이라면 아마 에너지를 얻는 데 몇 날 며칠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우 작고 무수히 많은 분자들이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서, 마치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빠르게 변화하게 된다. 단계별 0.1~0.3초 정도의 무수한 과정들을 통하여 우리가 먹은 음식물들은 우리 몸을 움직이고 구성하는 필수 물질로 바뀌게 된다. 즉, 우리 몸은 확률에 베팅한 것이다.
우리가 밥을 먹고 소화하고, 잠을 자고 깨는 이 과정들이 결국은 확률에 맡긴 것이라니, 신기한 일이다. 하지만 확률이 우연일까?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힘이 나는 것은 나에게는 당연한 것, 즉 '필연'이었다. 어쩌면 작게 보면 우연인 것들도 크게 보면 필연인 것이 우리 삶이 아닐까 싶다. 분명 우리 삶에 우연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지금 당신도 우연히 이 글을 읽고 있을 확률이 크다. 하지만 구독과 댓글을 통하여, 필연으로 연결할 수 있다.^^;;) 계산되고 측정 가능하며, 통제 가능한 상태라면, 아무리 작은 확률이라도 그것은 필연이다. 결국 우연과 필연은 계산하고 예측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 우리 삶은 어떨까? 이번 일만 보아도 그렇다. 지난 세월 내가 뿌린 자격지심의 씨앗은 또 다른 자격지심의 열매로 이렇게 십 수년 만에 돌아와 버렸다. 우연한 사고였을까? 자격지심이라는 필연적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삶은 결국 우연을 가장해 필연을 돌려준다. 우연만으로 가득 찼다면, 혹은 필연만으로 가득 찬 삶이었다면, 우리는 쓸데없는 마음 고생도 안 하겠지만 즐거움도 없을 것이다.
고생하면서 즐거움을 얻는 게 삶이고, 우리는 고생을 줄이고 즐거움을 키우기 위해 애쓴다. 즐거움만 쫓으면 고통이 오고, 고통을 감내하다 보면 즐거움이 오기도 한다. 알 것 같은데, 또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서 인생이 기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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