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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김영하의 "검은 꽃" : '공간'을 중심으로 읽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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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1993년 12월, 한국문학의 새로운 플랫폼이고자 문을 열었던 문학동네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을 발간, 그 첫 스무 권을 선보인다. 문학의 위기, 문학의 죽음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문학의 황금기는 언제나 과거에 존재한다. 시간의 주름을 펼치고 그 속에서 불멸의 성좌를 찾아내야 한다. 과거를 지금-여기로 호출하지 않고서는 현재에 대한 의미부여, 미래에 대한 상상은 불가능하다. 미래 전망은 기억을 예언으로 승화하는 일이다. 과거를 재발견, 재정의하지 않고서는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없다. 문학동네가 한국문학전집을 새로 엮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은 지난 20년간 문학동네를 통해 독자와 만나온 한국문학의 빛나는 성취를 우선적으로 선정했다. 하지만 앞으로 세대와 장르 등 범위를 확대하면서 21세기 한국문학의 정전을 완성하고, 한국문학의 특수성을 세계문학의 보편성과 접목시키는 매개 역할을 수행해나갈 것이다.
저자
김영하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0.10.20

들어가며 - 특별한 의미를 가진 책

(그 분은 모르겠지만) 김영하 작가는 내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작가다. 이 책은 여러번 읽었던 소설이다.
이 작품은 1905년에 멕시코로 이주한 조선인 이민자 1033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시간적 배경을 가진 여느 소설과 마찬가지로 역시 일제 치하 민족의 수난사를 다루고 있다. 다만 일제의 탄압과 생활고를 피해서 고국을 ‘떠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다른 동시대 배경의 소설들과 차별되는 공간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방식 또한 특별했던 소설이었다.

이 글에서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간의 이동에 초점을 맞추어서 책을 다시 읽어보려 한다. 


경계가 사라지는 '갇힌 공간' 일포드 호

이야기는 일포드 호에 타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들은 가난한 농민, 몰락 양반, 제대한 군인, 장사꾼, 도둑, 파계신부, 왕족의 후손 등 매우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포드 호에서 그려지는 가장 큰 서사적 특징은 이들 다양한 군중이 좁은 공간에 갇히면서 ‘한 집단으로’ 섞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가난에 찌들거나 신변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는 등 더 이상 그들의 조국에서 희망이란 찾을 수 없는 인물들이며, 내몰리듯이 신대륙에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을 모집하는 영국의 일포드 호에 몸을 싣게 된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결국 사람들은 근거 없는 희망 하나로 버틴다. 그 와중에는 신분제의 질서를 끝까지 유지하고자 하는 양반 계층과, 천민들의 모습이 함께 나타나 갈등의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극한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는 식욕, 성적인 충동, 공격과 다툼 등 그저 인간 본연의 본능이 중요시될 뿐 양반과 상놈의 구분은 유명무실해지는 것이다. 비좁은 공간에 양반과 천민이 뒤얽혀 밥 먹고, 용변 보고, 아기 낳고, 괴질로 죽은 자를 위한 푸닥거리까지 하게 된다. 이는 신분 평등의 실현 공간이 된다는 점에서 어쩌면 긍정적인 공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기존의 윤리와 질서체계가 지워지고 있으며, 윤리의식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된다는 점에서 (만약 노비의 신분의 인물에게는) 일포드 호가 해방의 공간, 자유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인상적인 것은 이러한 자유와 해방의 모습이 아이러니하게도 극한의 고립과 답답함이라는 설정의 공간 내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멕시코에 가면 좋은 일자리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다. 비좁은 선실과 전염병, 비위생적인 시설 등 고통과 괴로움의 공간인 일포드 호에서도 버텨내는 모습에서 일시적인 자유와 해방, 그리고 희망이 나타난다.


삶을 위한 투쟁의 공간, 에네켄 대농장

기나긴 항해 끝 찾아간 멕시코에서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을 강산이라고 부르던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산도, 강도 없고 오로지 넓은 땅만 있는 멕시코의 드넓은 농장은 그들의 강산을 잃은 슬픔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아가기 위한 치열한 투쟁 앞에 이민자들은 감상에 젖을 여유조차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애초에 이주민에게 터무니없이 불리한 조건 때문으로, 이는 결국 이들이 농노로 팔려온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도록 했다.


에네켄이라는 식물을 재배하는 대농장은 열심히 일을 해도 돈을 모을 수 없고, 돈을 모을 수 없어 계약금을 내고 농장을 나올 수도 없으며 어렵게 돈을 모아 농장을 나온다 해도 달리 취직할 곳이 없어 다시 농장에서 일해야 하는 악순환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공간에서는 결국 ‘삶’을 위한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멕시코의 마야 부족과 조선 이민자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국토가 외부인들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 근대 국가로서의 체제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 지배 계급에 의한 가혹한 차별과 노동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장주들로부터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착취당하고, 간혹 저항하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에네켄을 벗어나게 되면서, 작품의 배경은 멕시코 전역으로 확대된다.

에네켄 밖의 드넓은 공간: 거대한 역사적 숙명에 작아지는 인간

멕시코의 에네켄을 벗어난 멕시코 전국으로 무대가 확장되면서, 서사적인 특징이 변화하게 된다. 그것은 오브레곤과 판초 비야 등, 멕시코 역사에서의 실존 인물들의 격렬한 다툼에 관한 이야기에 조선인 이민자의 등장인물을 엮어서 들려주면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유독 인물들의 내면에 대한 표현의 비중이 줄어들고, 주로 정세의 설명에 치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멕시코의 내전에서 누가 승리하든 조선의 이민자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석연치 않게 느껴진다.


작가는 상당한 비중을 가지면서까지 멕시코의 내전을 그려낸 것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을까?
작가는 20세기 초, 조선과 남미 여러 나라의 현실이 나란히 배치하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는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데, 특징적인 것은 이들의 상황이 당시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말만 제국인 대한제국의 무능한 모습과 주변 열강들에 의해 식민지 신세로 전락하는 과정의 조선과, 멕시코에선 멕시코혁명, 과테말라 혁명 등의 남미 국가들이 겪는 참담한 모습은 모두 중세적인 질서로부터 탈피하고, 근대로의 진입 과정에서 보이는 제3세계 국가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이러한 참담한 혼란의 본질적인 원인은 ‘사회 질서의 교체’라는 정치적 문제가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이 부분의 배경이 되는 멕시코 전역의 공간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조선에서는 식민지 지배가 그러했듯, 정치적 독재와 그러한 질서를 교체하기 위한 대립으로 인해 비참한 인간성의 파괴가 자행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앞의 두 공간이 극한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삶의 기로에 선 인간이 윤리와 신분질서 등 인위적인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공간이었다면,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멕시코 전역은 결국 다시 등장인물을 얽어낸다. 정치와 권력의 충돌 속에서 피를 흘리고 희생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숙명론이 다시 드러나는 공간이다.


탄생과 멸망의 땅, 과테말라의 마야 신전

죽은 자는 무국적을 선택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죽는 거야.. 그러니 우리만의 나라가 필요해. 우리가 만든 나라의 국민으로 죽을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죽지 않을 수는 있어. 무국적이 되려고 해도 나라가 필요한 거라고..


위의 대사에는 국가를 잃어버린 국민의 설움이 묻어 나옴과 함께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 드러나 있다. 일본이라는 국가를 거부할 수는 있어도, 그것 또한 자신이 속한 다른 나라가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냉철한 논리를 전제로 한 결론은 사실상 실행이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40명의 인원으로 이루어진 국가가 과연 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만한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신대한’이라는 자신만의 국가를 세우고 만다. 이러한 행위에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릴지라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절실한 욕구가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작중 인물들도 자신들의 행위가 불합리한 행동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후에 비록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들은 식민지인도 아니요, 무국적인도 아닌,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편, 무대가 되는 공간인 마야신전의 본래 주인들은 멕시코 현지의 농노의 신세에 처해져 있다. 이들은 우리 민족과 식민지라는 같은 운명을 공유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마야제국은 멸망해 버렸다는 사실은 작품에 대한 일종의 암시적 기능을 하고 있다. 당시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도 결국 멸망한 국가임을 생각한다면, 멸망해 버린 흔적이 있는 거대 문명지에서의 마지막 전투는 결국 ‘신대한’의 국민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한 것이다. 따라서 마야 신전은 곧 국가가 탄생하고, 역사가 깊은 신성한 공간이지만 동시에 ‘멸망’, ‘소멸’의 공간이며, 이는 곧 주인공 김이정이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과 현실의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마치며

앞에서 살펴본 공간들은 각각 보여주는 바가 달랐으나 공통적으로 윤리․정치․신분제․식민지 현실 등 인간이 만들어낸 장애물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의 ‘자유’와 ‘해방’이 실현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와 해방이 이루어진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박해와 압박에 의해서라는 점은 이러한 공간들의 공통적인 특징들은 곧 작품의 주제와 연결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인간의 무력함과 처절함이 아닐까?

이 작품은 비극의 상황에서 헤매는 식민지하 국외의 민족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민족의 아픔의 역사라는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러한 극한의 혼란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기회주의적이면서 나약한 본성을 그려냈다.
또한 멕시코의 역사 속에서 마야 부족의 이야기와 함께 이야기를 전했다. 이는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대할 수 있게 한다. 조선 이민자의 모습을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로 서술하는 방식과 어우러져 관점에 따라 다양한 진실이 존재한다는 작가의 역사인식의 태도가 드러나 있다. 일제 식민 지배하의 조선과 매우 닮은꼴인 멕시코의 마야 문명은 멸망해 버렸지만,지금 우리는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그것이 과연 우리가 뛰어났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우리는 나약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슬픈 예감이 든다.


우리 민족의 이야기이기에 가슴으로 읽을 수 있었고, 비록 비극적 결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가진 ‘믿음’에 대한 열정을 위하여 모든 것을 불태우는 모습에서 감동을 주는 작품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역사의 변화 시대 속에서 아무런 힘 없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들을 담담하게 들려준 것 같다. 괜찮다고, 어쩔수 없었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최근 국제 정세 속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생각나 더욱 씁쓸하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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