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수십 년 간 걸었다고 해서 우리가 걷기의 달인인 것은 아니다.
잘못된 자세로 오래 걸어왔다면, 오히려 고치기 힘든 상태일 확률이 높다.
나의 일기쓰기도 그랬다. 나름 10년 넘게 써 왔지만 항상 부족한 느낌이 든다.
특히 다른 사람들의 글들을 읽으며 부끄러운 마음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다들 글을 잘 쓰는지...정작 나는 일기쓰기 조차 다시 읽을 때마다 부족해 보인다.
글을 잘 쓰고, 일기를 잘 쓰는 법이 있지 않을까? 고민 끝에 이 책, 《거인의 노트》를 읽게 되었다.
'김교수의 세가지'라는 유튜브로 유명한 김익한 교수가 유튜브 내용을 다듬어서 책으로 내셨다.
그는 한국국가기록연구원장,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장을 지낸 '대한민국 1호 기록학자'로 불린다.
책의 구성을 보면
1부 에서는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부에서는 구체적으로 생각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방법, 정리한 것을 분류하는 법을,
3부에서는 기록하는 구체적 방법을 소개했다.
이 글은 독서 후 기억에 가장 선명히 남은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한 것이다.
기록은 각인이다.
나는 기록을 중요한 내용을 잊지 않고, 나중에 다시 읽기 위해서 글로 '저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김익한 교수는 이를 두고 잘못된 기록의 사례로 지적했다.
왜냐하면 기록은 저장이 아닌 '실천'이기 때문이다.
즉,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중요한 내용을 나의 것으로 '각인'하는 행위.
그 기록하는 행위 자체로 기억에 오래 남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제대로 각인하지 않고 그저 다시 읽을 생각으로 기록한다면, 나중에는 왜 기록했는지조차 잊게 될 것이다.
기록은 발견이다.
SNS에는 사람들의 특별한 사건과 가장 즐거운 일들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기억된다.
게다가 우리 삶에 영화와 같은 특별한 사건은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
만약 일기장에 특별하고 중요한 것만 기록한다면 결국 텅 빈 일기장이 될 확률이 높다.
일상의 기록은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들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불현듯 떠올랐던 어떤 아이디어, 운전하다 흘깃 본 설산의 풍경, 익숙함에 속아 잊고 있던 소중한 사람의 마음...
일상의 작은 일 속에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하고, 포착하는 것이 바로 기록이다.
가능한 짧게, 키워드 위주로, 자주 기록하라.
기록에 많은 시간을 쓰지 마라(?)
길게 메모할 바에는 아예 적지 마라(!)
저자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
핵심을 간추리는 것이 기록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정말 가치있는 것을 뽑아내려면 버리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완벽함은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성취된다.(생텍쥐페리)
보석을 세공하듯, 계속 깎아내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기록의 최대 장점은 하면 할수록 점점 실력이 늘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반복을 통해서 숙달되고, 요령이 생기는 것은 사실 모든 기술에 해당되는 사항일 것이다.
하지만 기록은 시각적으로 바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기에 더 빨리 익힐 수 있다.
특히 전자 기록이 아닌 자필로 기록하는 것을 추천한다.
노트나 수첩의 부족한 지면 때문에 더 압축하고 줄이는 훈련이 되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언어로 기록하라.
내 생각과 언어로 기록하라는 말이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쓰는 언어가 다 내 언어가 아니란 말인가?
나의 관점과 나의 관심을 기준해야 한다.
저자는 교수로 재직하면서 아마 학생들의 '짜깁기' 과제를 수도없이 읽어봤을 것이다.
그는 '한 끗 차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선별과 편집이라는 측면에서 짜깁기와 요약은 거의 같은 행위다.
타인의 언어와 표현을 재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인지,
내 '언어와 관점'으로 이루어졌는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만약 서평을 쓰고자 한다면, 최소한 책을 두 번 읽어야 한다.
저자의 관점 입장에서 한 번, 그리고 내 관점에서 한 번.
기억에 잔상처럼 남아있는 정보를 순간적으로 편집해 내는 것이 요약이자 창조다.
논어에는 '도청도설'이라는 표현으로서 경계하고 있다.
'길에서 전해 듣고 그것을 그대로 길에서 말한다면 덕을 버린다.'
배움에 있어서 마음에 간직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마치며
쓰고 나서 많이 부족해 보인다. 너무 자의적인 책 리뷰는 아닐까?
책의 주요 내용을 더 많이 담았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쓰고 싶다. (사실 이미 몇 번을 썼다 지웠다 수정한 글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책의 핵심 내용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동안 책을 읽을 때마다, 그리고 가장 큰 고민은 책장을 덮자마자 아무 기억이 안 난다는 점이었다.
그 기억 상실에 대한 불안 때문에 필기하며 책을 읽었다. (특히 어렵거나 중요해 보이는 내용 위주로)
하지만 이 책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그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다.
기록은 내가 몰랐던 내용이나, 어려운 내용을 적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관점에서 기록을 본다면 모르는 분야 글을 읽을 때 책 전체에 줄을 그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기록을 읽어도, 여전히 모르는 상태이거나 어려운 상태일 확률이 높다.
오히려 가장 쉽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래서 자유자재로 내 언어로 기록할 수 있는 것을 기록해야 한다.
오독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주체적으로 기록하라.
이 책의 핵심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 저자
- 김익한
- 출판
- 다산북스
- 출판일
- 2023.03.08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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