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일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바쁘지 않으면 본인의 사무실 자리로 오랍니다. 평소에 마초(?) 기질이 있는 선배였습니다. 덩치도 있고, 성격도 화끈한 선배였는데, 저를 좋게 보셔서 가끔씩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술자리를 갖기도 했었습니다.
"어이~내일 뭐하냐? ~님이랑, ~님이랑 술 먹는데, 너도 와라."
"제가요? 거긴 제가 낄 자리가 아닌 거 같은데요. 저는 1팀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전 술도 안 먹지 않습니까?."
나름 완곡하게 거절을 했죠. 사실 두 분중 한 분은 제가 존경하는 선배님이었습니다. 참여해도 될 만한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술자리가 가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제가 잘못한 첫 번째 부분 같습니다. 처음에 그냥 싫다고 한마디 했으면 됐었네요. 나름 저는 조심스럽게 거절한 건데, 저의 상담을 해 준 동기 1은 이게 거절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흠... 정말 그런가요?)
저는 술을 먹지 않습니다. 술이 약하기도 하고, 술 마시는걸 별로 좋아하질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중요한 자리에서만 먹습니다. 그동안 웬만해선 술자리에 참석은 해도 사이다로 짠하고, 술은 잘 따라주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라는거야. 나는 술 마시면 운전 못하니까, 아침에 우리 집으로 와. 나랑 카풀하자."
그렇습니다. 이 선배의 집은 저의 집과 차로 15분 정도 거리입니다. 저는 무슨 말인지 저는 바로 이해했습니다. 이미 서너 번 겪었던 일이지요. 자신이 술 약속 있을 때, 혹은 회식 때면 이따금 저에게 일일 카풀을 요청하던 선배였습니다. 음주운전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투철한 정신을 지니신 분입니다.
사실 친한 선후배 사이끼리, 함께 술을 먹는다면 서로 카풀을 해 줄수는 있겠지요. 그런데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술을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술자리를 갈 일도 적지요. 그런데 저는 또 그놈의 빌어먹을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절을 잘 못하죠. 그래서 그동안은 서너 번 일일 카풀을 해 주었습니다. 그 선배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냥 별 생각 없이 평소처럼 저에게 부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 저 그날 약속이 있어서 술자리 못가요." (제 딴엔 두 번째 거절입니다. 여기서도 그냥 싫다고 말했으면 됐지 않았나 후회되는 대목입니다.)
이번에는 확실히(?) 거절을 했습니다. 몸이 너무 피곤했고, 느낌 상 제가 낄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실제로 약속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나름 핑계를 댄다고 둘러댄 것이죠. 그런데 저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꼭 들키더라고요. 이번에도 그랬나 봅니다. 앞에 붙였던 저 '아...'가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선배는 저에게 재차 묻습니다.
"요놈 봐라? 구라 치는 거 다 알아. 누구랑 만나는데? 내가 물어본다?"
"형님이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가 누구 만나는지까지 말씀드려야 합니까?"(여기서라도 싫다고 말했으면 됐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누구냐고? 야이 새꺄 싫으면 싫다고 말해 ㅆㅂ"
욕을 먹으니 저도 그만 욱하는 성질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물론 욕은 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나름 대들었습니다.
"제가 두번 완곡히 싫다고 말한 겁니다. 욕하지 마십시오. 형님이 부탁한 입장이고, 저는 그걸 거절했을 뿐인데 왜 제가 욕을 먹습니까?"
"아 x발. 말 졸라 싸가지없게 말하네. 알았어. 그냥 싫으면 싫다고 말해 ㅅㄲ야~ 기분 ㅈ같게 만드네"
"거절하는 방법이 예의에 어긋났다면 죄송합니다. 가보겠습니다"
당시에는 최대한 예의있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너무 예의를 지킨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사건은 끝났습니다.
끝났는데, 저는 혼자서 끝나지 않고 끙끙 앓고 있습니다.
우선 그 선배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 마음에 자꾸만 걸립니다. 그리고 한심하게도 이런생각을 하는 제 자신때문에 또 화가 납니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매일 회사에서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날 밤에 저는 잠도 설쳤습니다. 억울한 마음이 컸죠. 내가 정말 욕먹을 짓을 한 건가? 그냥 솔직히 싫다고 했으면 됐으려나? 아무리 그래도 이 선배도 좀 심했던 것 아닌가? 더 따지고 나올걸 그랬나?
이 사건에 대해 회사 동기 두 명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게 처음부터 딱 잘라 거절해야지. 너가 거짓말한 거 때문에 명분을 줬잖아. 찾아가서 잘 풀어. 계속 마주칠 텐데."
첫 번째 동기의 말입니다. 아, 내가 잘못하게 맞구나. 그래서 화내셨구나. 내가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면 일이 해결되겠구나. 하고 넘어가면 되겠는데, 그러기엔 저도 뭔가 응어리진 게 느껴집니다. 어디다 풀어야 할지 모르다가 또 다른 다른 동기 2에게 털어놓았습니다.
동기 2는 (뭔가 살짝 신난 듯한 기색을 보이며) 길게 이야기를 합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남녀 관계에서만 가스라이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후배 간에도 가스라이팅이 존재한다. 그 사람 질 안 좋은 놈이다. 엄연히 부탁을 거절하는 입장이 넌데 왜 네가 을이 되었냐. 너는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 너는 하나도 잘못이 없다. 같이 쌍욕 해주고 나오지 그랬냐. 쓸데없는 걱정하고 있는 것 자체가 가스라이팅이라는 뜻이다. 이번에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면 너는 두고두고 당할 것이다. 이 참에 깔끔하게 손절해라. 마주칠 때 마다의 불편함을 감수해라.
음... 아.. 맞다. 이 형은 이별 이후에 가스라이팅에 꽂힌 형이었지..
이야기를 하고 나니 가스라이팅이 맞긴 맞는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고, 나는 피해자일 뿐이다. 이렇게 결론내리자. 그런데 또 복잡한 마음이 듭니다. 제가 평소에 부탁을 잘 들어줄 것 같은 기대치를 주었기 때문에, 너무 착한 척을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성격을 이제 와서 바꾸긴 어려운데 어떡하지? 온갖 상념이 떠올라 책도 잘 읽히지를 않네요. 벌써 4~5일이 지났는데 말이죠.
이런 마음으로 지내다가 오늘 회사 복도에서 마주쳤습니다. 머뭇거리다 어색한 인사를 건냈는데, 굳은 표정으로 그냥 휙 지나갑니다. 갑자기 또 열이 받습니다.
책 리뷰를 써야 하는데, 책도 잘 안 읽히고, 또 글도 잘 안 써지고..
이런 글이라도 써 올리게 됩니다. 음..잡담 카테고리니까요. 잡담을 쓴 겁니다.
제가 잘못한 거 아니죠?
...
후, 정신 차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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