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바닥을 찍는 경험은 누구나 한다. 나는 군대에서 겪었다.
20여년 전 오늘, 어느 초소에서 우연히 들었던 그 말들을 기억한다.
나는 구안와사라는 것을 겪었다. 정확하게는 3차신경 마비였다. 매일 밤마다 차갑고 습한 바람을 맞으며 최전방을 지켰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졸았는데, 신경이 마비된 것이다. '차가운 바닥에서 자면 입돌아간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21살의 나이, 자기 얼굴에 신경을 많이 쓰는 나이였다. 소대장, 중대장에게 호소했지만, 최전방 부대였기에 일단은 기다리라는 말만 들었다. 1주에 한번 오는 군의관 순회진료 때, 나는 작업을 나가있느라 진료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1주를 더 기다렸다. 그 과정에서 나는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며 휴가를 내보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짬 순'으로 휴가를 나가야 했기에, 나는 휴가를 나가지 못했다. 전방 부대의 특징상, 근무인원의 공백 때문에 휴가를 자주 나가지 못하고 말년에 한번에 몰아서 나간다. 계산해보니 백일 휴가 이후, 314일동안 휴가를 나가지 못했다.
지옥같은 시간이었다. 결국 국군강릉병원에 갔지만, 완치를 장담할 수는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생명에 지장 없으니 군 생활 잘 하라는 대답을 해줬다. 군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많이 티가 안나고 원래 잘생겼으니까 커버가 된다는 농담같은 대답을 했다. 니가 그렇게 우겨서 힘든 근무 빼 줘가면서 군 병원을 다녀왔으니, 이제 닥치고 군생활에 집중하라는 말을 반복했다.
라면을 먹으면 면발과 국물이 아래로 줄줄 흘렀다. 나는 치료 적기를 놓쳤다고 생각했다. 엄청난 심적 고통이었고 군 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바로 윗고참은 너땜에 자기도 힘들다면서 오히려 나를 욕했고, 얼굴 병신새끼라고 불렀다. 결국 나는 휴가를 나와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아 돌아았다. 실탄을 실제 장전까지 하고 초소에 들어가 매일 밤을 새며 근무하는 부대였기에, 소대본부로 보직이 바뀌었다. 자살사고 등을 방지위해서이다. 마침 바로 옆 사단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터졌었다. 나는 통신병이 되어 소대장과 항상 붙어 다녀야 했다.
처음에는 몰랐다. 그걸 처음으로 알았던 사건이 발생한 날. 그게 오늘이다.
정말 적나라한 표현이었다. 심지어 평소에 잘 해주었던 '아버지 군번' 고참이 매우 신랄하게 내 욕을 했다. 강산이 두번 바뀌는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 딕션과 표현들을 기억한다. 함께 국가를 지키기 위해 산 속으로 끌려와 있는데, 아픈 전우를 대상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더 많이 아팠다.
나로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사람을 매도 할 수 있나 싶었다. 내가 군 생활을 편하게 하려고 '뺑끼'부린다고 매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억울했다. 오해가 아니었다. 의도된 곡해였다. '김일병'의 마음을 나는 이해한다. 그 날 이후 모두가 악마로 보였다.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군 생활 내내 단 한마디도 불평도, 욕도 하지 않았다. 나라는 인간의 자존심의 문제였다. 이를 악물고, '그냥 하라는 건 다 했다'. 처음에는 힘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대담한 척, 극복해낸 척 했다. 운동도 열심히 했고, 분교대에서 입상하여 표창을 두 개 받았다. 비록 포상휴가를 나가지는 못했지만(나중에 말년에 붙여서 나갔다)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던 것이 기억난다. 새롭게 태어났다고. 이제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편지했다.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극복한 척 하면서 생활했더니 어느 순간 정말 극복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단 3개월 정도 지난 뒤 다시 전투분대로 복귀했다.고참들이 하나 둘 전역하고, 소대 내에서 짬 순으로 2인자의 자리까지 올랐다. 사실 그 때까지도, 나는 다 낫지 못했었고, 신경도 많이 쓰고 있었다.(사실 아직도 후유증이 남아있다). 그래도 절대 티 내는 일은 없었다.
나보다 더 힘든 후임들이 많이 들어왔다. 어깨가 계속 빠져서 총을 들지 못하는 녀석, 너무 여린 마음에 남들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는 녀석, 미국 시민권자인데 한국인으로서 군대에 와서 온갖 깽판을 치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불면증 증세를 겪었다.
중대장이 나를 불렀다. 고통을 이겨냈던 경험을 살려보라고 했다. 근무나 작업을 빼 주시기도 하고, 또 짬짬이 시간을 내어서, 적응을 하지 못하거나, 힘든 처지의 후임들을 한 명씩 상담했다. 그리고 상세하게 일지를 기록하는 업무를 맡았다. 보호병사와 관심병사가 따로 있는 것을 그 때 알았다. 1년 전의 나의 기록도 읽을 수 있었다. 매우 상세하고 객관적으로 기록이 되어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원래 간부가 해야하는 일인데, 그것을 병사 손에 맡긴 것은 직무유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중대장님이 매우 뛰어나신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ROTC출신임에도 대령까지 진급하셔서, 아직도 나라를 지켜주시고 계신다. 뉴스에도 몇번 나오신 분이다.
또 신기한 것은, 다른 힘든 사람을 도움으로써 진정으로 내 힘듦을 이겨냈다는 것이다.
간부가 해야 할 일을 내게 맡긴 것이 옳은지 나쁜지는 둘째 치고, 어찌 됐든 나는 그들의 무사 전역을 도왔다.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일단 그녀석들은 예전의 나와 같았다. 아무도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에게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그들이 가진 고통을 스스로 이겨내도록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직접 경험한 것들을 말해주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은 내 말을 잘 들었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가장 힘들어할 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해 주면서, 너도 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 다행이 그 녀석들은 씩씩하게 짬을 먹고 자랐다. 한 녀석은 그림을 그렸는데 나를 부처처럼 그려서 선물했다. 거의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녀석들과는 친구처럼 연락을 하고 지낸다.
내 인생에서 가장 바닥을 찍었던 그 날이 바로 오늘이다.
왜 나에게 이런일이 생겼나 원망과 절망의 시간들
다른 부대원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웠던 시절, 하지만 너무나 힘들었던 그 시절
매일 밤, 총기와 실탄이 내 손에 쥐어져 있었던 그 시절 했었던 수많은 생각들과 경우의 수들, 극단적인 상황에서 생각했던 극단적인 수단들까지도, 하지만 또 나를 믿고 도와주려고 했던 사람들,
그 시절 가슴속에 떠올렸던 그 시절의 어머니,
남 몰래 흘린 눈물과, 오기하나만으로 버텨냈던,
그 시간들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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