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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책리뷰)《작별인사》by 김영하 : 비린내를 잡고 바다내음을 남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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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가 전하는 '작별인사'의 여운을 맛보다

이 책이 출판된 것은 작년 5월이다. '작가의 통찰력'이란 말을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실감하게 해 준 책이었다. 김영하 작가님은 2023년에 인공지능 이슈가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터질 줄 알고 있었을까? 

소설은 비록 픽션이지만, 분명 그 시대를 반영한다. 사람들의 고민과 고통, 기쁨과 먹고사는 문제들이 모두 작품에서 나타난다. 무엇보다 작가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시대의 흐름을 읽게된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것은 재미있다. 

너무나 인간에 가까워 자신이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AI, 철학과 예술을 배운 인공지능, 필멸의 존재라는 것 외에는 인간과 다를바 없는 인공지능의 설정과 더불어 사건 전개에 있어서 속도감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인공지능과 로봇의 이야기는 책으로도, 영화로도 많이 다루어진 재료이다. 하지만 김영하 작가만의 조리법으로 만들어진 이 책은 특유의 여운을 남기는 책이었다.

 

 
작별인사
김영하가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9 년 만에 내놓는 장편소설 『작별인사』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별안간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린 한 소년의 여정을 좇는다. 유명한 IT 기업의 연구원인 아버지와 쾌적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철이는 어느날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가 난생처음 날것의 감정으로 가득한 혼돈의 세계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정신적, 신체적 위기에 직면한다. 동시에 자신처럼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을 만나 처음으로 생생한 소속감을 느끼고 따뜻한 우정도 싹틔운다. 철이는 그들과 함께 수용소를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나지만 그 여정에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작별인사』의 탄생과 변신, 그리고 기원 『작별인사』는 김영하가 2019년 한 신생 구독형 전자책 서비스 플랫폼으로부터 회원들에게 제공할 짧은 장편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집필한 소설이다. 회원들에게만 제공하는 소설이라는 점은 『살인자의 기억법』 발표 이후 6년이나 장편을 발표하지 못했던 작가의 무거운 어깨를 가볍게 해주었다. 작업은 속도감 있게 진행되어 2020년 2월, 『작별인사』가 해당 서비스의 구독 회원들에게 배송되었다. 분량은 200자 원고지 420매 가량이었다. 원래 작가는 『작별인사』를 조금 고친 다음, 바로 일반 독자들이 접할 수 있도록 정식 출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2020년 3월이 되자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뉴욕의 텅 빈 거리에는 시체를 실은 냉동트럭들만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서 있었고, 파리, 런던, 밀라노의 거리에선 인적이 끊겼다. 작가들이 오랫동안 경고하던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갑자기 도래한 것 같았다. 책상 앞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썼던 경장편 원고를 고쳐나가던 작가에게 몇 달 전에 쓴 원고가 문득 낯설게 느껴진 순간이 왔다. 작가는 고쳐쓰기를 반복했고, 원고는 점점 2월에 발표된 것과는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름이면 끝날 줄 알았던 팬데믹은 겨울이 되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고, 백신이 나와도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세계보건기구 WHO가 팬데믹을 선언한 지 2년이 지나서야 작가는 『작별인사』의 개작을 마쳤다. 420매 분량이던 원고는 약 800매로 늘었고, 주제도 완전히 달라졌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가르는 경계는 어디인가’를 묻던 소설은 ‘삶이란 과연 계속될 가치가 있는 것인가?’,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 것인가’, ‘어쩔 수 없이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로 바뀌었다. 팬데믹이 개작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고, 원래 『작별인사』의 구상에 담긴 어떤 맹아가 오랜 개작을 거치며 발아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치 제목이 어떤 마력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자기에게 어울리는 이야기로 다시 쓰도록 한 것 같은 느낌이다. 탈고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고를 다시 읽어보았다. 이제야 비로소 애초에 내가 쓰려고 했던 어떤 것이 제대로, 남김 없이 다 흘러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_’작가의 말’에서 전면적인 수정을 통해 2022년의 『작별인사』는 2020년의 『작별인사』를 마치 시놉시스나 초고처럼 보이게 할 정도로 확연하게 달라졌다. 그리고 김영하의 이전 문학 세계와의 연결점들이 분명해졌다. 제목을 『작별인사』라고 정한 것은 거의 마지막 순간에서였다. 정하고 보니 그동안 붙여두었던 가제들보다 훨씬 잘 맞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것은 ‘작별인사’라는 제목을 내가 지금까지 발표한 다른 소설에 붙여 보아도 다 어울린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검은 꽃』, 『빛의 제국』, 심지어 『살인자의 기억법』이어도 다 그럴 듯 했을 것이다. _’작가의 말’에서

 

저자
김영하
출판
복복서가
출판일
2022.05.02

 

 sf 상상력이 갖는 허무맹랑함의 비린내를 철학적 고민으로 잡아내다

책장을 덮으며 잘 만들어진 생선 요리를 먹은 느낌이 들었다. 김영하 작가는 역시 숙련된 요리사임이 분명하다. 반전 장치와 극적인 설정을 통하여 SF장르 특유의 속도감과 기발함을 잘 살려냈다. 슈퍼맨, 아이언맨 등, 잘 만들어진 SF장르 작품들의 특징은, 진지한 존재론적 고민을 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SF 장르가 갖는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장르 설정상, 실제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것을 '작품이니까' 가능한 세계를 그려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상상의 비약이 이루어지고, 만능적 능력, 우연적 전개가 이루어지게 된다. 필자는 SF장르에서 나는 이런 '비린내'를 못 견디는 편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린내를 김영하 작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이라는 재료를 첨가하여 제거했다. 이를 위해서는 등장인물의 설정과 사건을 통하여 짜임새 있는 개연성을 부여해야 한다. 여기에서 작가의 관록이 느껴졌다. '철이'의 성장과 각성과정을 보여주면서, 그리고 '달마'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고 다른 많은 등장인물을 통해서 인간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있었다.

아쉬움이라면 다소 '흐릿한' 느낌이 강했다는 점이다.  책을 덮고나서 그 흐릿함이 뭔지 명확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저  '그럴 듯한 이야기' 정도의 선에서 그치고 있는 걸까? 김영하 소설가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시련과 싸우는 것'을 이 책에서 보여준 것인가? 들려만 준 것인가?라는 물음표를 메모해 둔 것이 눈에 뜨인다. 하지만 그쪽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작가에게 문제와 답을 요구하는 나의 나쁜 버릇이 또 나오는 것 같다.)

결국 그 '흐릿함'이 이 작품을 읽는 묘미였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생선요리 특유의 비린내를 잡아내면서도, 바다의 내음은 남겨둔 것 같다고나 할까? '어차피 상상의 이야기'라는 허무함은 잡아냈지만, 또 다른 종류의 허무함을 남겨주기 때문이다. '작별인사'라는 제목이 특히 그러한 느낌이 더 은은히 남아돌게 해 주는 것 같다. 

작별인사 표지, 출처: 교보문고 홈페이지 캡쳐

 

검은 꽃에서 나타났던 '갇힌 공간'의 재등장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갇혀있는 AI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장면이었다. 작품 속 세계관의 변화를 위한 과도기적이면서도, 치열한 고통과 생존의 공간이자, 모순적인 공간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그려지는 장면들을 읽으며 내심 반가웠다. 필자가 김영하 작가의 또 다른 작품 검은 꽃》을 '제대로 읽었었구나' 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필자가 발견한 김영하 작가의 서술상의 기법적 특징이라고나 할까.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기존의 윤리와 질서체계가 지워지고 있으며, 윤리의식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된다는 점에서 (만약 노비의 신분의 인물에게는) 일포드 호가 해방의 공간, 자유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인상적인 것은 이러한 자유와 해방의 모습이 아이러니하게도 극한의 고립과 답답함이라는 설정의 공간 내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검은 꽃》책 리뷰 포스팅 중에서-


https://jahyo.tistory.com/23 
 

(책리뷰)김영하의《검은 꽃》: 담담히 전해주는 씁쓸한 이야기

들어가며 - 특별한 의미를 가진 책 (그 분은 모르겠지만) 김영하 작가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이 책은 여러번 읽었던 소설이다. 이 작품은 1905년에 멕시코로 이주한 조선인 이민자 1033명에 대한

jahyo.tistory.com

(굳이 포스팅 주소와 인용문을 쓴 이유는, 사실 저 포스팅을 읽은 분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 다시 읽어보니 고쳐서 다시 써야 할 것 같다. 구성도 산만하고 너무 '공간'에 꽂혀서 쓴 것 같다 

 

자의가 아닌 '갇혀있는' 상황에서  등장인물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아수라장이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서로가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인식과 각성이 이루어진다는 점도 같은 특징을 갖는다. 진화의 관점에서 어쩌면 필수적인 '자연선택'의 과정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공간적 특징은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새가 태어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알 처럼, 억압된 공간이자 해방의 공간, 그리고  죽음의 공간이자 탄생의 공간이다. 

 

인간이 아닌 입장에서 인간을 생각하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작가의 목소리를 찾아보려고 힘썼다. 작품 속에는 주옥같은 대사들이 참 많았다. 작가는 많은 등장인물들의 대사에는 무게감이 있었다.

"이야기란 현실을 망각할 정신적 마약이다"

"허락된 모든 것을 동원해 시련과 싸우는 것"

"높은 수준의 의식과 언어를 가진 존재만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가 의식을 더 높은 수준으로 고양시킨다.."

"인간의 존엄성은 죽음을 직시하는 데에서 온다. 도태과정의 저항은 그저 본능일 뿐, 악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선악의 구분 없이 조건과 상황일 뿐이다"

 

결국 소설처럼 인공지능이 극도로 발전하여 이들과 구분되는 인간성이란 것은 결국 '죽는다'라는 것만 남는 미래가 오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상황이 왔을 때, 결국 인간이란 무엇일까?

나는 위의 질문이 이 작품의 핵심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 이야기로부터 오히려 인간성에 대한 고민, 나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결국 드러나게 된다.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의 시각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인공지능들의 이야기들은 인간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인간이 아닌 입장에서 인간을 정의하면 어떻게 정의하게 될까? 다만, 인간과 완벽히 비슷할 정도의 존재이지만 인간은 아닌 존재의 입장이라면? 

작품 중에서  '인간을 멸종시킬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인간성을 AI에 투사한 것일 뿐이다'라는 대사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드러나고 있다. "인간은 바이러스다"라고 말했던 영화 매트릭스의 스미스요원의 대사처럼,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다. 

 

마치며

책을 덮으며 내가 느낀 공허함은 처음에는 결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작가가 뭔가 답을 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해 보니 작가는 많은 예시답안과 질문들을 던진 것을 깨달았다.

'필멸의 존재'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삶은 더없이 짧다. 따라서 매우 열심히 그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인간에게 시간은 가장 귀중한 것이다. 작가는 "늘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할 뿐, 유일한 실재인 현재는 그냥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라고 경고하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모든 것을 걸고 싸워라'고도 말해주었고, '신선처럼 살다 죽는 것'도, '이야기라는 마약에 탐닉하는 것'도 현재를 잘 보내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생각은 이명일뿐이다'라고 했던가? 나의 머릿속은 온갖 상념과 물음표가 가득 차 있었다. 결국 물음표는 존재하는데, 답은 없는 상황에 대한 부재의식이었던 것 같다. 지금 당장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작가가 전하는 '작별인사'는 누구에게 하는 것일까?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그런데 읽는 재미도 있었다. 더할 나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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